소름 끼치는 웃음이 흡사 악마 같은 눈치 빠른 여자킬러.
대단한 연기력을 자랑하며 나의 경계심을 흐려놓은 그녀의 능력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음만 달리 먹는다면 나 같은 영웅보다 더 멋진 영웅이 될 수 도 있을 텐데....
빠르게 상념을 털어낸 나는 오른쪽 옆구리에 칼을 쑤셔 넣으며 비릿하게 웃던 킬러의 눈을 손끝으로 찔러 들어가며 방어를 하기 시작했고 눈이 찔린 그녀는 당황한지라 칼을 놓치고 저만큼 떨어져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를 골로 보내지 못해 분한 듯 싶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넌 이미 독 안에 든 쥐야. 서서히 숨통을 조여주마. 너에게 GXM-100따위는 과분하니 말이다. 하긴 안 통하니 써먹지도 못하겠구나? 아하하하..."
광폭한 웃음으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아마도 저들을 조종하는 지도세력인 것 같았다. 새빨간 혀를 드러내며 웃는 그녀의 핏빛 입술. 그녀의 입술에 입을 포갠 나는 문득 구역질이 난다.
훗.. 그나저나 다 똑같이 생긴 레이져 총 따위에 이름은 왜 저렇게 길고 많아? 저거 뿐만이 아니다 검도 무슨 이상한 영어를 잔뜩 씨부려놓아 이놈이 저놈이고 저놈이 이놈인 것 같은데...쩝.
"네놈의 잘난 척은 이쯤에서 접어두겠다. 후후후. 어디 뼈속까지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도 네놈의 잘난 영웅심으로 참고 견뎌봐라. 아하하하."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의 그녀는 오른손을 들고 손목을 까딱하며 무슨 사인을 보냈다.
그 악랄한 웃음은 벌건 악마의 미소로 비춰지자 온몸의 신경이 잔뜩 곤두서는 것 같다.
아마 천년유혼에 나오는 섹시한 여자가 거무튀튀한 요괴로 변신하는 게 다 이런 과정으로 비롯되는 듯....
일단은 하나뿐인 믿음인 무기를 손에 넣어야 했다. 옆구리에 꽂힌 묵직한 칼날은 깊숙이 박혀 있었고 뽑아내는 것 역시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다. 눈보라 날리듯 붉은 방울방울이 눈을 현혹시키며 튀었을 때의 아찔함은 고통을 넘어선 고뇌였다.
혈관을 막았던 칼이 뽑히자 콸콸 넘쳐흐르는 상처를 지압하기 위해 왼손은 오른쪽 옆구리를 움켜줘야 했다.
때문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른손과, 양 다리.
배쪽에서도 타는듯한 고통을 호소하여 나는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갑작스레 피를 많이 흘려 찾아 든 어지러움. 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리 될 바엔 정면 돌파이다.'
팔 하나쯤, 다리 하나쯤은 내어줄 각오로 놈들을 뚫고 뛰쳐나가는 것이다.
이 후미진 골목을 지나면 순간이동 장치가 사람들의 이목을 숨기며 자리잡고 있다.
내 목표는 그곳까지 달리는 것.
하지만 할 수 있을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일단은 해보는 거다. 실패하면 죽자!!
훗. 그리 되면 이 시대의 마지막 영웅은 사라지는 것인가?
"난 아직 죽지 않는다! 나의 도움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오를 굳히고 무기를 바로잡은 나는 오른손의 힘줄이 터지는듯한 착각이 들만큼 마구 휘두르며 길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상황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퍼억.
어느 정도 범위를 좁힌 녀석들은 나를 옭아매기 위해 여기저기 쑤셔대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력은 그들의 늦은 공격을 빠짐없이 보여지기에 아슬아슬 자리를 옮기며 도리어 그들의 콧등을 무참히 베어내었다.
코가 뭉둥하게 잘려지며 내지르는 그들의 비명.
이번엔 두 놈이 동시에 달려든다.
"죽어라!"
"죽엇!"
뚱뚱한 놈의 비계덩이를 반원을 그리며 도려내자 기겁을 하며 한 놈이 물러섰다.
바로 저기. 빈틈이다!!!
나는 달렸다.
젖 먹을 힘까지 내어 달렸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만큼 달렸다.
뚫린 배와 베어진 옆구리는 이때만큼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한다면 이 아픔보다 더한 고통이 나를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잡아!! 놓치지 마라!!!"
앙칼진 여자의 외침.
뒤따르는 놈들은 근처 세워둔 바퀴 없는 바이크를 향에 달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가 준 소형 폭파기를 작동시켜 내던지며 재빠르게 안전구역으로 향해 뛰었고 가까스로 순간이동장치로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으아아악.."
대책 없이 도로 후미진 안전구역 밑에 하수구처럼 가장된 순간이동장치에 뛰어든 나는 계단을 밟지 못해 2층 높이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을 찾아 드는 통증에 순간 움직일 수 조차 없었지만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긴 한숨부터 나온다.
"휴우~"
하지만 곧이어 배와 옆구리의 뻥 뚫린 상처에 생각이 미치자 엄청난 고통에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으윽....하아....하아...."
처량한 듯 쥐어진 나의 정든 무기. 녀석은 자신의 의지로 나에게 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무척 미안한 듯 피눈물을 떨구며 슬퍼하는 것 같다.
아직도 칼에 베어진 진득한 핏물이 똑똑 떨어지니 말이다.
이시대 마지막 영웅(6)
